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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27| | (081226) 이 별
Thoughts 2008. 12. 27. 02:37

(081226) 이 별

1. 사실 벌써 헤어졌어야 하는게 맞았다.

이미 마음이 떠난 연인을 다시는 곁에 두지 못할까,  돌아서서 저리 가버리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하는 불안함에 무표정한 얼굴과 그보다 더 무표정한 손을 억지로 잡고 놓아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과 같았다. 아니 그 무표정은 무표정해서 무표정이 아니라 더이상 지을 표정조차 없이 지쳐 진이 빠져버린 무표정에 가까웠다. 그렇게 힘들게 나를 만나고 있었음은 진작에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어쨌든 이러한 상태로 오래 갈 수 없음는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척 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겠지. 같이 한 시간이니 만큼 정이란 걸 떼기 어려울꺼야.라고 시간이 지날 수록 만날 때마다 오히려 난 더 애정을 표시했고, 실제로 나의 마음은 그러했다. 어쩌면 그것으로부터 점점 다가오는 이별을 모른척 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런식은 곤란하다.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미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어떻게 보내야할지도 모르게 되어버린다.  밖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우산은 없고, 약속시간은 늦었고 택시는 잡히지도 않을 때, 비를 쫄딱 맞는 것은 어느정도 마음이 다져져 있기 때문에 춥고 축축해도 버틸 수 있지만, 짱짱한 봄날에 꽃단장을 하고 상큼한 노래를 들으며 한껏 들뜬 마음에 집을 나섰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이 모든걸 적셔버리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이별통보는 마치 후자와 같은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3시에 공원에서 만나자'
라고 여느 때와 같이 해놓고 막상 나가니

'이제 그만 만나자' 
와 같은 따위의 밑도 끝도 없는 헤어짐 말이다.

그러니깐 사실 위에같은 말은 아직 헤어짐을 인정하지 못하는, 고등학교 때 배운 '낙화'라는 시를 여전히 깨우치지 못한 나의 푸념일 뿐이다.
헤어질 때를 억지로 잡고 놓아주지 못하고 있던 나를 원망해야 마땅하다.


2. 나는 물건을 고르는 안목이 아주 뛰어나거나, 쇼핑을 자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전부터 살 것이 있어 같이 동행을 하던 엄마나 누나 혹은 예전의 친구들은 꽤 나를 까다롭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나는 내가 정해놓은 아이템의 규칙이 있어서 그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것이 발견되기 전에는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으면 차라리 사고 후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정해놓은 규칙에 부합되는 제품이 나올 때 까지 기다린다라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말 이거다 싶을 때는 똑같은 것을 세개나 산 적도 있다. 선물도 아니고 모두 다 내가 쓰려고 말이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가는 만큼 예전보다 훨씬 유해지기 했지만 여전히 무엇을 선택할 때  최소한 '이거는 지켜줘야 한다'라는 선은 분명히 존재하고 유효하다.   


3. 처음으로 정장이란 걸 입게 된 것은 대학교 때였다.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은 언제나 성공하기보단 실패하기가 쉽다. 처음 산 정장을 입게 됐을  행거에서는 멋졌던 옷이 나에게서는 어색하기만 했다.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는데, 그 어정쩡함의 여러가지 원인들 중에서  캐쥬얼에만 익숙해있던 나의 자세가 어색하게 만든 이유의 8할은 넘어보였다. 
 이제는 매일 정장을 입고 출근하긴 나이긴 하지만(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정장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장이란 것은 누구말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에게 전장에 나가는 '기사의 갑옷'과 같을 때가 있다. 비장하고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면도-셔츠-타이-정장을 입는 행위는 꽤나 하나하나 신경이 쓰이고 마음가짐 뿐아니라 자세까지도 실제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일례로 중요한 면접을 보러가거나  상견례 또는 결혼을 할때나, 혹은 조문을 가는데(말하자면 개인과 개인 혹은 사회와 사심을 가장  순수하게 가린 채 그 조우의 형식과 그 내용이 주가 되는 그런 때와 장소) 추리닝을 입고 가기에는 역으로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일상이 아닌 개인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거나 또는 격식이 필요한  때와 장소가 필요한 때가 있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 알게 됐었을 때, 그러니깐 이제 더이상 반팔티와 청바지만 입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나이는 지났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내가 해야 할것은 분명했다.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갑옷'을 하나 준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깐 남들이 말하는 좋은 브랜드나 비싼 가격이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고,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이여야 했다.  그것은 단 하나면 족했다. 회사에 입고가는 모든 옷이 그럴 필요도 없고, 내가 꼭 필요한 순간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한벌이면 됐다. 남들이 볼때 어제 본 것과 오늘 본 것에 대해 전혀 눈치를 못채더라도, 실제로 다를 게 하나 없더라도 나는 마음가짐이 일단 다른 그런것이 필요했다. 바로 '내 것'임을 알수 있는 그런 것을 말이다.


4. 처음 만났을 때 그랬다.

난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한번도 첫눈에 반한 적이 없었다. 아니 첫눈에 반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왠만해선 최대한 애정을 품으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종의 자존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면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만났다는 그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화이트셔츠는 정장보다 자주 사지만, 정장보다 더 여러군데 입을 수 있다. 정장을 입을 때 가장 기본이지만 언제나 기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갈아입는 여러가지 셔츠들 가운데 진짜로 가장 나에게 잘 맞는, 가장 내가 신뢰하고,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날에 내가 찾아들 수
밖에 없는 한 벌(두벌도 안된다. 그러면 그 존재감이 약해진다)이 꼭 필요하다라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자주 입지않아도 그런 하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각설하고 남자에게 어떤 화이트셔츠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나의 생각이라는 얘기다.

그 '한 벌'에 대한 나의 조건은 까다로웠다. 절대로 하얀색이어야 한다. 절대로 아무런 모양이나 색도 없어야 한다. 심지어 실조차도.
어깨는 딱 맞아야한다. 남들이 생각하는 맞는다는 것보다 아마 0.5에서 1인치는 더 안쪽으로 들어와있을 거다. 허리도 잘 맞아야한다. 정확히 말하면 요새 유행하는 잘록한 허리의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팔을 앞으로 나란이 하여 팔을 엇갈렸을 때 양 어깨쭉지에서 양 허리와 등 사이에 두 축이 생긴다는 느낌이다(왜 이것이 중요하냐면 이 느낌이 들면 어디에서도 자세가 엉클어질수 없다) . 팔은 절대로 겨드랑이와 어깨를 두르는 통이  커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통과 손목으로 내려오면서의 폭은 차이가 나지 않을 수록 좋다. 그리고 절대로 소매 끝부분에서 팔통이 확 좁아지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 소매의 끝은 완전히 내렸을때 손등을 1/3정도 덮으면 된다(사실 이건 수선이 가능한 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조건에 비해 중요하지는 않다). 그리고 다시한번 말하지만, 절대로 아무런 무늬가 없는 절대로 하얀 색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은 입었을때 이러한 조건 하나하나를 체크하는게 아니라, 입는 순간에 다 알아채버려서 '아.이거다'하는 그 느낌이 있다.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바로 그랬었다.


5. 모든 것에는 유효기간이 있었다. 나만 좋다고 언제까지 같이 할수는 없다.

벌써 헤어지는 것이 맞았다. 이미 양소매는 솔기가 터지기 시작한지는 오래됐었다. 목 뒤부분은 또 어떤가. 정말로 닳아서 구멍이 나기 직전이었다. 
한번 입을 때마다 세탁을 해야하는 화이트셔츠의 운명이기 때문에 내가 자주 집어들수록, 그 기분좋음을 느끼려 할수록, 처음의 그 하얀 빛은 점점 잃어갔고, 더 많이 세탁소에 가야했고, 더 많이 다른 옷들과 화학약품속에서 섞인 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했을 것이고,그럴수록 더 세탁소에서 돌아온 이후도 예전같이 되긴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그조차도 녀석과의 함께한 시간이라고 여겼고, 그것이 더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마 누가 최근의 이 화이트 셔츠를 입은 나를 구석구석 발견했다면 어떻게 이렇게 될때까지 입느냐고 이제 제발 그만 입고 버리라고 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많이 상해 있었다. 그럼에도 더 대단한 것은 이 녀석은 나를 절대로 그렇게 누구에게도 보이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그 '한 벌' 이라는 화이트셔츠로써의 본인의 자존심도 많이 상하게 했을 것이다.
 
오늘도 평소와 같이 기분좋게 녀석을 들어올려 입었을 때, 녀석은 작은 소리를 냈다. 셔츠라는 이 녀석의 본분을 생각했을 때 단추 부분이라든지, 소매끝자락이 튿어질 수는 있지만. 등쪽 어깨부분이 튿어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직감을 했다.
하지만 그대로 벗어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다는 것은 이 녀석에 대한 나의 마지막 예의가 아니였다.
그대로 나는 위에 스웨터를 겹쳐 입었다. 그 스웨터 안에서 내가 움직임을 할때마다 녀석은 점점 더 상처가 커져갔지만 그렇게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내가 할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는 내가 우겨서도 같이 할수 없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녀석이 항상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조금은 더 얇은 녀석이라  땀에 잘 젖어 여름에는 특히 몸을 더 조심히 움직여야 했고, 엄마는 다리기 어려운 이 녀석때문에 성질을 내며 세탁소에 맡기시기 시작했으며. 조금은 때도 더 잘탔고 과하게 몸을 움직이기엔 다른 옷들보다 더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게 그렇듯이. 헤어지고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조차도 그리운 법이다.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또 다른 그 '한 벌'의 화이트셔츠를 만나 너를 까맣게 잊을 때까지.
그 많은 시간과 장소에서 나를 다스려줬던.
그 많은 추억과 생각들을 만들어줬던.


'한 벌'의 화이트셔츠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오늘 이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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