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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ghts 2008. 11. 28. 00:06

(081127) 관계

 짧은 얼마간 동안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나에 대한 평가인데.

 A: "요새 꽤 긍정적으로 바뀌었네?"
 
 B: "뭐가 이렇게 까칠해. 점점 더 심해지네."

 C: "너는 참 항상 너답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참 너 답다"

 D: "어쩔 수 없어. 결국 세속인이 되어가는구만..."

 F: "점점. 달관자가 되어가는 같아..."

 이 일련의 평가가 시간의 흐름속에서 변화의 과정이 아니라, 거의 동시간적으로 내려진 현재의 '나'라는 동일인물에 대한 평가다. 참으로 희한하다.
이게 뭔가 하다가 생각을 해봤다. 하나의 강력한 추론인 즉슨, 만난 시점에 따라 변덕스런 B형의 다중인격적인  하나하나의 성격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럴싸하다. 그리고 이렇게 규정지으면 쉽다. 끝. 난 B형이니깐.

 그런데 두번째를 생각을 해보면 약간은 더 심도가 있게된다.(다음부터 쓰는 건 나의 생각의 정리이고, 아무런 이론이나 통계에 의거하지않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적인 짧은 경험에 의한 나의 추론이다..내가 무슨 근거가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단순한 개인의 사고의 정리이다.) 

자, 찬찬히 생각해보자. '나'라는 사람은, 혹시 여기에 어쩌다 들어오는 이 글을 읽게 된 당신이라는 사람(공개된 주소나 찾아올 루트가 아직은 없는  이 블로그에 도대체 우연이라도 한달에 200명 가까이 들어오는 사람들이 난 누군지 궁금하다)은 언제나, 꽤 한결같은가? 아니 사실상 이런건 참 표현이 어려운데. 어떤 철학이나 고매한 지조를 가지고 그것을 기준으로 움직이는가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이런 사람인것 같다고 뭉뚱그려서라도 말할수있는가 하는 얘기다. 사람의 외모 뿐아니라 생각도 당연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외부환경에 따라 바뀌어가는건, 혹은 발전하거나 넓어지거나 또는 첨예해지거나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거 말고, 어떠한 시간내, 시작점과 끝점을 가진 폐쇄적인 시간을 잡아놓고 동시간대라고 부를 수있는 동안 말과 행동 그리고 사고가 어떠한 큰 덩어리로 묶여질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혹은 앞에서 말한 세가지 중 한가지라도.


뭐 딱히 나는 범례를 들 수없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예를 들어보자(어차피 이 글은 내 생각을 정리하고자 쓰는것이고, 혹은 다른 누군가본다고 하더라도 내가 읽어달라고 초대한건 아니지 않은가?!)
나라는 사람이 움직이는 공간이 뻔하다. 회사,집,여흥자리 나머지는 혼자 있는 시간이다. 장소가 다를 뿐 거의 앞서 말한 동시간 내에 있는 지점들이다. 거기에서는 나의 역할이 존재한다. 존재에 따른 역할은 당연히 달라진다. 근데 생각해보면, 그 각각의 지점에서도 누구와 있는가에 따라 그 역할들이 각 지점이라는 대전제에서 좀 더 세분화되어 진다. 여기서 대전제는 지점에 따라

회사-박사원
집-가족(구성원)
여흥자리-친구

대충 이렇게 나뉜다고 보자. 여기선 분명히 역할이 있다. 회사에서는 업무를 수행하는 나름 격식이 있는 존재이고, 집에서는 말그대로 가장 자연인이고, 여흥자리는 앞서 말한 두가지의 사이에 존재하는 그런 역할이다(근데 역할이 맞나? 역활이 맞나?) 근데 좀 더 세분화해서 들어가면 이거 더 복잡해진다. 

회사에서 서부장과의 관계로 들어가면 나는 '불평많은 낙천주의자'에 가깝고, 조과장님(봐라, 벌써 부장에게는 안붙는 '님'자가 과장님한테는 붙는다. 격식이 존재하는 회사라는 조직내에서의 관계를 시작한 사람들일지라도!)과의 관계로 가면 '스킨쉽이 과한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 여기에 있어설 안될 놈'이며, 재호君에게는 '인생의 고민이 많은 패배주의적 동반자' 정도 될것이고, 저어기 있는 이과장한테는 '중국차하고 있는 박사원', 정상무에게는 '얘가 걘가?' 정도이지 싶다. 자, 그럼 집으로 가볼까? 가장 오랜생활을 해온, 내가 집에선 막내니까 태초부터 나를 보아온 사람들이다. 아마 나에 대한 평가가 나를 제외한 가족간에는 어떠한 컨센서스가 이뤄져있는지는 몰라도, 내가 가족구성원들에게 하는 태도로부터 역으로 유추해보면 이 역시 미묘한 관계의 차이가 존재한다. 아빠한테는 '무조건적인 반항아 또는 세상에 막 들어선 사회인이자 버릇없는 30세' 정도 일것같고, 엄마한테는 '허약한, 불쌍하니깐 잘해줘야하는' 첫째누나한테는 '사회적이지 못한, 말이 앞서는, 갇혀있는 자유로운 영혼' 정도, 둘째누나한테는 '정서적,사회적 동지' 정도 일 것같다. 마지막으로 여흥자리의 친구(여기서 친구는 이해관계를 떠난 수직적 관계에 있지 않은 자라고 하자.따라서 나이와 어떻게 알았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관계를 보면 더 많은 구성원 수만큼이나 더 다양한 역할로 나뉠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조언자' 또는 '술친구', '학습조력자','재밌는 사람', '말많은 사람', '생각이 많은 사람', ' 생각이 없는 사람' 등등 꽤나 더 많은 정의로 각각의 친구들에게 내려져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진짜 한 시기의 '나'는 하나로 규정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왜 대체 동시간의 나는 이렇게나 많은 형태로 나타나고, 다양한 평가를 받는가? 역시 편한 결론은 변덕스런 B형 만한게 없다. 아니면 다중인격자라든지.  


인류의 발전이라는게 어떻게 어떻게  되다보니, 개개인에서 사회라는 단위로 점점 확대되어져 이뤄져왔다. 단지 사람뿐이 아니더라도 많은 생명체라는 것들이. 그 과정에서 어떠한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룰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이건 과정으로보면 어떠한 '합의'라는 것에서 이뤄진다. 사회에서는 개개인의 패턴에 때로는 규제를 갖기 위해 혹은 그것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 이뤄진다. 이 '합의'라는 것은 항상 정답은 아니다. 정답 혹은 진리라는게 어디있겠냐마는(빅뱅의 탑은 진리가 어디가겠냐라고 하지만..탑은 진리미모라고 불리더군...). 쉽게 보면 회사라는 조직에서 벌어지는 걸 보면 된다. A라는 부서와 B부서는 분명 이해관계가 다르다. 구체적으로 재무를 관장하는 부서는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하나의 상품에 더 많은 마진을 붙이라고 비싼 가격을 받으라고 하지만(실적이 곧 이윤이라는 %이므로), 영업에서는 다량의 판매라는 결과를 위해서 더 싼 상품을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같은 회사내에서도 존재와 목적이 다르므로 그 방향점이 다르기 때문에, 둘만의 관계를 보면 그 중간이나 더 설득력이 있는 지점에서 합의에 이른다. 그게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서로 이해가 되는 부분에서 최대한의 +와 -를 고려한 어느 지점에서 만나 결론을 짓는다.
 
개인간의 관계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 A와 B가 만났다고 치면 A와 B는 살아온 조건과 가치관이 다 다르다. 따라서 몇차례 만남을 갖다보면 그 상대에 대한 '배려'가 생긴다. 이 '배려'는  타인을 포용한다라는 개념이 아니라, 여기까지, 혹은 이 정도는 나를 풀어놓겠다거나, 혹은 이선은 넘으면 안되겠다는 감이 자신도 모르게 발휘된다는 것이다. 만남을 유지하고 있는 둘 사이에 어떠한 음악을 듣는데 음악적 공통성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선 관계에 있어 굉장히 발전해가고 깊이 얘기가 되지만, 한명은 굉장히 마초적인 남자형제들 사이에서 자라났고, 한명은 여성스러운  여자자매들 사이에서 자라났다면 이성관에 대해서는 굉장히 다를 수가 있다. 이 부분은 그렇다면 충돌의 여지가 굉장히 높아진다. 하지만 이들은 점차로 그부분에 대해서는 대화에서 회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굳이 그 부분이 확대되어지지 않아도 그 관계는 음악이라는 것으로 충분히 유지-발전 될 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누워있다 다시 일어나서 추가하는데, 이 부분은 개개인의 어떤 부분에 대한 이해의 스코프가 자라난 환경과 발달해온 사고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해 가능한 부분에서 그 합의점을 찾거나 혹은 더이상 찾기를 포기하거나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많은 이해의 스코프를 가진자에게 더 우호적이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그렇지 못하거나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관계가 맺음과 끊김으로 나뉘는것은 또 아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얼마든지 유지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각각 다른 개인-개인과 관계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는 재미있는 부분만이 확대되어 보여질 수 있고, 누군가에는 반대로 부정적인 모습으로 강화되어지기도 한다. 또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멋지게, 또는 측은하게, 또는 활발하게, 또는 소심하게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하나의 관계마다 어떠한 합의점이 만들어지고 시간과 만남의 횟수에 비례하여 그것이 공고해지고 확대되어진다는 결론이다. 

처음에 말했던 다양한 평가는 다 나의 모습이지만, 결국 그 대상이 누군가에 따라서 비춰지는 확대된 모냥새라는 것이다. 사실 하나의 그 면면이 전체는 아니지만서도, 내가 아닌 상대인 각각의 인물들에게는 나는 그렇게만 보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평가를 내리는 내가 만나는 개개인들 또한 그렇다고 생각하면, 편협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성급하다는 것일까?  글쎄 그것까지 다 파악하고 다 포용하려면 아마 그 관계의 합의점을 관장하는 제3인칭,'절대자'가 되는 것이겠지.
그리고 시간도 없고, 그에 앞서 결국 사람은 나를 위주로 생각 할수 밖에 없지 않은가? 

도대체가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또 다시 미궁으로 빠져든다. 다 나라는 사람인데. 도대체 관계 속에서 아무도 나를 규정지어 질 수 없다면.
내가 규정 지을 수 있는 나는 도대체가 뭔가. 죽기 전에는 뭉뚱그려서라도 희미하게 알아 낼 수 있기나 한건가?



뭐. 이런생각이 오늘 날짜에 들었었다고. 


 


+1. 요새는 계절이 디지탈로 바뀌는건지. 서서히 한 계절이 fade out되고  새로운 계절이 오는 게 아니라 오늘 띡 가을. 그리고 내일 띡 겨울이 되는 듯하다. 지구가 90도씩 쿼츠시계처럼 도는 것 같다.  가을이였다가 갑자기도 춥다니깐.

+2. 카드를 쓰면 문자로 전송해 주는 시스템을 처음으로 신청했는데, 생각보다 소비의 순간의 갭이 적다. 핸드폰 문자가 이 통지문자 포션이 관계로부터의 포션보다 많아지면 우울할 거 같다.

+3. 우리나라 책값은 비싸다고는 하지만 생각보다 여전히 싼거 같다. 커피한잔+담배한값 이면 책이 한권이거든.

+4. 사람들은 가끔 잡지의 힘을 무시하고는 한다. 거기엔 그 시기에 필요한, 생각보다 많은 정보들이 널려있다.

+5. 역시 조기퇴근은 좋다. 글을 써도 쫒기지가 않거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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